F.coco/F.talk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중에서

F.coco 2023. 4. 6. 20:10
반응형

이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행위 능력을 의미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권력이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사람이나 사물에게 작용을 가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중략)... 하지만 사랑에서는 권력이 훨씬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정의에 의존하는 것 같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능력으로 간주된다.

 

 에릭이 회의 후 만찬에 다녀온 다음 맞은 주말, 앨리스는 소파에 그와 나란히 누워, 에릭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신이랑 이렇게 있으면 정말 편안해요."

 그도 비슷한 말로 대답했으리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그 남자는 호응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오늘 저녁 몇 시에 본드 영화를 하죠?"

맞은 사람도 없고, 멍이나 비명도 없었지만, 권력의 균형이 에릭 쪽으로 확 쏠렸다.

저울에 올리면 앨리스는 힘이 약한 뜻을 전하는 가벼운 쪽이고, 에릭은 강력한 질문을 던지는 무거운 쪽이었다.

균형이 잡히려면 에릭이 "나도 당신이랑 있으면 편안해요."라고 대답해야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어쩌면 본드가 나오는 007 영화를 방영하는 시간이 정말로 신경 쓰여서], 앨리스는 패를 다 잃고 말았다.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상대가 당신과 같이 있으면 정말 편안하다고 말해도, 대꾸도 없이 TV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바꿀 수 있는 쪽에 힘이 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사랑의 목표는 소통과 이해이기 때문에, 화제를 바꿔서 대화를 막거나 두 시간 후에나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힘없고 더 의존적이고 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힘 들이지 않고 권력을 행사한다.

 

스탕달은, 애인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쪽이 상대방을 더 사랑하며, 그래서 두 사람 관계의 권력이 인지되기 마련이라는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양쪽이 저울의 수평을 유지할 때에만, 한쪽이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상대도 자연스럽게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에만, 권력의 존재를 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세한 차이만 벌어져도 권력은 재등장 신호를 보낸다.

"줄리엣,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요."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면,

상대가 "물론 알아요, 로미오. 나의 복덩이. 나도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죠......?"

라고 대답하는 상황에 악의는 없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엄청난 불균형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중략)...

 

에릭이 앨리스에게 몸을 뻗어 키스하면서 자신 역시 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그 남자는 대단히 평균적이고, 이해할 만하고, 용서할 만하게, TV 화면을 가로지르는 007의 움직임에 더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ㅡ그 남자는 여기서 레이저 유도탄이나 분사 추진 우주선 같은 것 없이도 007과 겨룰 만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