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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슬루페츠키 『양 한마리 양 두마리』중에서

F.coco 2023. 3. 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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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양 한마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레오폴트. 그가 사랑한 또 한 마리의 양은 군디였다.
레오폴트가 군디를 처음 만난 곳은,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양을 세고 있던 아홉 살 소년의 머릿속이었다.
소년이 헤아리던 양들 속에 군디가 섞여 있었고, 그 바로 뒤에 레오폴트가 있었다.
레오폴트는 첫눈에 군디에게 반해버렸다.
군디 바로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털이 복실한 하얀 엉덩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생각했다.
"정말 예쁜데! 저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봐! 틀림없이 예쁜 자식들을 낳겠는걸!"
레오폴트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소년이 눈을 감고 양이 울타리를 넘는 광경을 떠올리던,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가 나직하게 '열셋(이 열세번째가 바로 군디였다)' '열넷(그리고 레오폴트)' 하고 중얼거리고 나면, 그들은 안개 자욱한 아이의 꿈속에서 서로를 놓치고 말았다.
먼저 군디가 희미하게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은 레오폴트 차례였다.
그랬다.
 
하지만 다음날 밤, 레오폴트는 다시 군디를 만날 수 있었다.
레오폴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연민의 감정에 심장이 녹아버리는듯 했다.
하지만 곧 졸린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열셋......열넷......"
레오폴트와 군디는 이제 없었다.
"이봐요, 거기! 앞에 가는 아가씨!"
사흘째 되는 날, 레오폴트는 처음으로 군디에게 말을 걸었다.
나흘째, "뒤 좀 돌아볼래요?"
닷새째, "이봐요, 이름이 뭐죠?"
엿새째, "이봐요, 내 이름은 레오폴트예요!"
그리고 이레째, 레오폴트는 아무 말 없이 잠잠히 있었다.
여드렛날 군디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레오폴트의 눈을 바라 보았다.
"나보고 '거기'라고 부르지 말아요!"
군디는 처신이 분명한 양이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것이다.
그렇게 둘은 말을 트게 되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군디 역시 레오폴트를 마음에 담게 되었다. 뒷모습만 보고 사랑에 빠진 그 녀석을 말이다.
하지만 잠깐씩 스칠 뿐인 이런 상황에선 제대로 사랑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다정하게 말을 나누고, 그윽한 눈길을 주고 받고, 부드럽게 쓰다듬고 싶었지만, 날마다 주어진 시간은 단 2초 뿐이었으니......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랑을 꽃피워갈 수 있겠는가?
그래도 처음엔 농담도 주고받았다. "영화 보러 갈까?" "우리 제일 끝에 가서 서보자!"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반 년이 지나자 유머는 바닥났고, 이제는 깊은 낙심의 침묵만이 떠돌 뿐이었다.
어느 날 밤 군디는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레오폴트, 이젠 나를 잊어줘. 이렇게는 더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
레오폴트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잔인한 운명, 존재하길 원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그는 군디와 자신을 갈라놓는 소년의 나른한 목소리를 증오했다. 자신을 만들어낸 소년을 원망했다.
그는 분노에 가득차 소리쳤다.

"이봐, 너!"

 
레오폴트의 눈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이 땅꼬마 양치기 녀석아!"
이제 레오폴트는 밤이면 밤마다 으르렁댔고, 곧 군디도 목소리를 더했다.

"생명을 줘! 우린 그냥 살아만 있으면 돼!"

 
"......열세엣......"
소년은 졸리운 목소리로 여전히 양을 세고 있었다. "열네엣......"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양을 세다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밤마다 헤아리는 양들 가운데 두 마리를 사랑에 빠지게 하면 어떨까?

사랑에 빠진 양 두마리는 느긋하게 싱싱한 풀밭 위를 어슬렁거리며, 따사로운 햇빛에, 열정적인 사랑에 취해 서로 얼굴을 비비며 키스를 하고 있다.
소년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양들은 나이를 먹고 많은 새끼 양들이 태어나, 이제 풀밭 위에는 온통 작고 귀여운 양들 천지다. 추운 겨울도, 무서운 늑대도, 노여움도 없는 그런 세상. 그곳은 그야말로 낙원이다.
소년은 이불을 끌어올렸다. 새끼 양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해보았다.
아주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그런 상상을 할 때면 소년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소년은 다시는 양을 셀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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