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oco 16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중에서

힘이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행위 능력을 의미한다. 에서는 권력이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사람이나 사물에게 작용을 가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중략)... 하지만 사랑에서는 권력이 훨씬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정의에 의존하는 것 같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능력으로 간주된다. 에릭이 회의 후 만찬에 다녀온 다음 맞은 주말, 앨리스는 소파에 그와 나란히 누워, 에릭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신이랑 이렇게 있으면 정말 편안해요." 그도 비슷한 말로 대답했으리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그 남자는 호응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오늘 저녁 몇 시에 본드 영화를 하죠?" 맞은 사람도 없고, 멍이나 비명도 없었지만, 권력의 균형이 에..

F.coco/F.talk 2023.04.06

나아지는 걸 축하하는 겁니다| 『무탄트 메시지(말로 모건 지음|류시화 옮김)』 중에서

우리는 생일 케이크와 설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설탕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매우 강력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설탕은 백 년도 채 못 사는 무탄트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위적이고 피상적이며 가식적이고 달콤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치는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 결과 평생을 사는 동안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영원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데 실제로 쓰는 시간은 너무도 적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일 파티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들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나는 케이크와 축하 노래, 생일 선물 등을 설명하고, 나이를 한살 더 먹으면 케이크 꽂는 양초의 수도 하나 더 늘어간다고 이야기 했다. 그들이 물었다. 왜 그렇게 하죠? 축하란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하는 건데, 나이를 먹는 것이 무슨 ..

F.coco/F.talk 2023.04.06

후회하는 순간에 떠올리는 Non, je ne regrette rien(나는 후회하지 않아)_영화 파니핑크 삽입곡

영화 파니핑크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여자가 서른 넘어 결혼할 확률은 원자 폭탄에 맞을 확률보다 낮아요 1994년에 나온 이 영화를 2010년이 훌쩍 넘은 어느 날 처음 봤을 때는 영화를 보는 동안 한참을 참 기괴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뭐? 저런 대사는 어디서 근거한거야? 맙소사- 하기도 했습니다. 시한부이며 동성애자이자 사기꾼에 가까운 흑인 점성술사 오르페오. 그리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직장도 있지만 스물 아홉에 남자가 없어서 지독히 외로운,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자신이 직접 짠 관을 집안에 두고 그 안에 들어가 자는 파니. 파니는 오르페오의 얼렁뚱땅 타로점 -23이라는 숫자와 관련된 남자가 마지막 기회다-을 그대로 믿고, 마침 나타난 차량번호 2323인 건물주가 운명이라 생각하며, 그..

F.coco/F.talk 2023.03.30

슈테판 슬루페츠키 『양 한마리 양 두마리』중에서

사랑에 빠진 양 한마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레오폴트. 그가 사랑한 또 한 마리의 양은 군디였다. 레오폴트가 군디를 처음 만난 곳은,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양을 세고 있던 아홉 살 소년의 머릿속이었다. 소년이 헤아리던 양들 속에 군디가 섞여 있었고, 그 바로 뒤에 레오폴트가 있었다. 레오폴트는 첫눈에 군디에게 반해버렸다. 군디 바로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털이 복실한 하얀 엉덩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생각했다. "정말 예쁜데! 저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봐! 틀림없이 예쁜 자식들을 낳겠는걸!" 레오폴트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소년이 눈을 감고 양이 울타리를 넘는 광경을 떠올리던,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가 나직하게 '열셋(이 열세번째가 바로 군디였다)' '열넷(그리고..

F.coco/F.talk 2023.03.04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중에서

인생이란 정말 한번은 절망해 봐야 알아. 그래서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를 알지 못하면, 재미라는 걸 모르고 어른이 돼버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재미라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가.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 깨닫게 된 어른은 그것을 혹은 그것마저 잃어버릴까봐 문득문득 두려워 하게 되는걸. 삶은 그제서야 한 사람에게 제 무게를 온전히 싣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F.coco/F.talk 2023.03.01